영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한다. 반쯤 남아 있는 곡물라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안녕히 계세요!"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저기요! 컵은 반납대에 두셔야죠!”
영호는 카페 사장의 말을 뒤로한 채 밖으로 달려나간다. 뛰쳐나간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카페 앞을 서성인다. 은서는 그런 영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생각에 잠긴다.
-
‘엄마는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근데 난, 진짜 사랑을 해보고 싶은 거라고. 나는 내 돈 보고, 배경 보고, 부모를 보고 다가오는 게 싫어. 내 외적인 게 아닌 내면을 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은서가 미숙을 향해 울먹이며 소리친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미숙은 그런 은서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답답하기도 하다. 하지만 은서는 늘 진심 어린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은서는 매번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지만, 그때마다 찾아오는 것은 은서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
‘은서 씨, 집안이 정말 듣던 대로 좋네요.’
‘자기야, 결혼하면 우리 한강뷰에서 살 수 있어?’
‘장인어른 회사에 나도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은서가 아닌 은서의 배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매번 돌아오는 같은 말들. 은서는 매번 최선을 다했지만, 누군가는 은서의 외모를 사랑했고, 누군가는 은서의 배경을 사랑했으며, 누군가는 그 둘을 사랑했다. 하지만 은서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다.
-
생각에 잠겨 있던 은서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카페 바깥으로 아직도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는 영호가 보인다. 은서가 빠른 걸음으로 카페 밖으로 나가 영호를 부른다.
“저기요!”
“저, 저요?”
“저희 잠시 대화할 수 있을까요?”
“네?”
영호가 처음 겪어보는 설렘이었다.
-
영호가 현관문을 열고 히죽거리며 들어온다. 콧노래가 멈추지 않는다. 신발을 벗다 신발장 위에 달린 거울을 한 번 보고는 씨잇, 웃는다. 다시 들썩이며 거실로 들어선다.
'아니야, 설마. 무슨 첫 만남에 집까지 와.'
혼잣말을 하면서도 입꼬리는 내려갈 줄 모른다.
'...그래도 언젠가는 올 수도 있잖아?'
행복한 상상이 스치는 순간, 영호의 시선이 집 안을 훑는다. 바닥에는 벗어 던진 양말이 널브러져 있었고, 싱크대에는 며칠째 미뤄둔 그릇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소파 위에는 입다 만 옷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구석에는 언제 먹었는지도 모를 컵라면 용기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 되겠다."
영호는 소매를 걷어붙인다.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한다. 싱크대에 한가득 쌓여 있던 그릇은 콧노래의 박자에 맞춰 하나둘 사라진다. 냉장고 문을 열자 코를 찌르는 쉰내가 훅 밀려온다.
"으윽..."
반사적으로 코를 막던 영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라도 은서가 이 집에 들어와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영호는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1년 365일 내내 방 안을 가리고 있던 암막커튼을 활짝 젖힌다. 외모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이런 것일까, 영호는 청소를 하면서도 자신의 얼굴이 비추는 곳곳마다 멈춰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침대 청소를 위해 이불을 젖히자 종이 쪼가리가 힘없이 툭 떨어진다. 가면 상자에 들어 있던 주의사항 쪽지이다. 영호가 중얼거리며 읽어본다.
‘가면의 존재를 발설하면, 효력이 사라진다?’
주의사항 쪽지를 손으로 구겨 쓰레기봉투로 던진다.
“말이야 안 하면 되지.”
영호가 청소를 계속 이어가고, 띵동, 문자음이 들린다. 습관처럼 화면을 켠 영호는 무심코 알림을 확인하다 그대로 굳어버린다.
‘영호 씨, 저예요. 지은서. 혹시 주말에 시간 되세요?’
영호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보낸 사람의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한다. ‘지은서’. 이건 분명 게임 길드 채팅도 아니고, 단체 광고 문자도 아니고, 김미영 팀장도 아니다. 정말 자신의 휴대폰으로 온 문자였다. 영호는 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던져버린다. 안에 있던 쓰레기가 쏟아져 다시 방 안이 어질러진다. 하지만 상관없다. 영호는 제자리에서 연신 폴짝 뛴다. 곧바로 답장을 보내려다 손가락을 멈춘다.
“너무 빨리 보내면 이상하겠지...?”
휴대폰을 내려놓고 3초. 다시 집어 든다. '아니, 늦게 보내는 게 더 이상한가?' 또 내려놓는다. 그렇게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하기를 수십 번. 결국 참지 못한 영호는 활짝 웃으며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한다.
‘좋아요. 어디서요?’
‘영호 씨네서 잠시 대화할 수 있을까요? 영호 씨가 불편하면 그리다에서 보고요.’
영호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지른다.
‘두 시까지 방촌역으로 나갈게요!’
-
현관문이 열리고 은서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인다. 영호의 양손에는 마트에서 장을 봐온 짐들이 가득하다. 집 안은 의외로 깔끔하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고, 싱크대도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깨끗하긴 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모습. 소파 위 쿠션은 삐뚤고, 바닥에는 물걸레질한 흔적이 아직 채 마르지 않아 있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오랜 시간 배어 있던 쉰내는 집 안 곳곳을 차마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남아있다. 은서가 무심코 코를 움찔거린다. 영호가 허둥대며 창문을 더 활짝 열어젖히고는 멋쩍게 웃는다.
“아, 아... 환기가 잘 안 되네. 집이...”
얼굴이 붉어진 영호는 괜히 식탁 위를 한 번 더 닦고, 이미 가지런한 신발까지 다시 맞춰 놓는다. 자신의 집을 괜스레 두리번거리며 앞머리를 연신 쓸어내린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은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집이 참 아늑하고 좋네요.”
“여기, 앉으세요. 식사 안 하셨죠? 제가 간단하게 좀 차려드릴게요.”
컵라면만 먹던 영호가 장을 봐온 재료로 요리를 시작하고, 은서가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집 좀 둘러봐도 될까요?”“아, 아! 네, 그럼요! 요리 금방 끝나요. 그, 뭐..게임? 게임이라도 하고 계세요!”
“게임요? 전 게임은 잘 안 해서...”
“아....넵”
다시 어색한 침묵이 방안을 맴돈다. 영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리다 다시 요리를 시작한다. 은서는 그런 영호를 힐끗 바라보고는 시선을 돌려 방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벽에 걸린 액자, 가지런히 정리된 책상, 책상 위에 놓인 컴퓨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주하게 청소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컴퓨터 하시는 거예요?"
"아... 네. 게임도 하고...뭐, 넵."
영호가 멋쩍게 웃는다. 은서는 컴퓨터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간다. 그 순간.
사각.
발끝에 무언가가 걸린다.
"뭐지?"
은서가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집어 든다. 구겨졌다가 다시 펴진 듯 구김이 선명한 종이였다.
'주의사항'
작은 글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게 뭐예요? 주의사항?"
영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뭐하는곳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