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의 Arabesque No.1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작은 카페 안. 두 남녀가 테이블에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 화장기 없는 얼굴이 곱고 수수한 은서는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다가 끝내 입술을 꿈틀거리더니 눈물을 터뜨린다. 그런 은서의 모습에 남자는 지겨운 듯 흘겨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곧바로 은서가 따라 일어난다. 가지 말라며 남자의 팔을 붙잡지만, 남자가 거칠게 뿌리치자 휘청거리며 의자를 붙든다.
"멍청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 멍청한 줄은 몰랐다."
"왜 그러는 건데, 왜 헤어지자고 하는 건데?"
"됐고. 앞으로는 이런 거 해주지 마라. 이런 거로 사람 마음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더라."
남자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내던지고는 카페 밖으로 나갔고, 은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카페 안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은서에게 쏠리지만, 은서는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주변의 수군거림도, 따가운 시선도 은서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빛이 조금도 들지 않는 방 안. 커튼 사이로 비치는 빛에 영호는 암막커튼을 당긴다. 삐용, 쉭. 요란한 게임 소리와 키보드 자판 소리가 정신없이 들려온다. 모니터 빛에 겨우 보이는 책상 위에는 빈 컵라면 용기가 탑처럼 쌓여 있고, 언제 마지막으로 비웠는지 모를 재떨이에 가득한 담배꽁초들은 무너질 지경이다. 쓰레기 더미 너머, 키보드 위에서 영호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띵동'
별안간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영호는 스피커 볼륨을 줄이고 숨죽인다. 띵동, 띵동. 초인종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영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한다. 영호가 조심스럽게 현관 앞으로 다가가자 초인종 소리가 멈춘다. 영호가 문에 귀를 가져다 댄다.
"계세요? 등기입니다!"
영호가 외시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자, 우체부가 문 앞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바깥의 남성을 확인한 영호는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손을 뻗는가 싶더니 이내 짧은 한숨과 함께 팔을 떨군다. 다시 외시경을 통해 밖을 바라보자 우체부는 이미 떠나고 없다. 두 번, 세 번, 다시 바깥을 확인한다. 한참이 지나 바깥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영호가 머리를 푹 숙이며 주저앉는다. 영호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들자, 작은 눈에 매부리코, 두꺼운 입술, 푸석한 피부가 드러난다. 한참을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영호는 일어나 다시 컴퓨터 앞으로 향한다. 컴퓨터 속 게임 화면을 보자, 다른 유저가 영호를 다급하게 부르는 채팅 기록이 남아 있다. 영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건다.
'무슨 일이세요?'
'거래소에 청룡검 올리신 분 아니세요?'
'아, 맞아요. 사실 건가요?'
'혹시 조금 더 싸게는 안 될까요.'
'이미 최저가로 올렸던 거라 어려울 거 같은데요.'
'조금만 싸게 해주세요. 진짜 찾기 힘든 거라 그래요.'
영호는 귀찮은 듯 혀를 차며 게임 속 ‘귓속말 거부’ 버튼을 누르려다 뒤이어 올라오는 채팅을 보고는 멈칫한다.
'현금으로 살게요. 300만 원.'
영호가 모니터 가까이 몸을 당긴다.
'현금으로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어떠세요?'
'선입금 가능하세요?'
'직거래만 가능합니다.'
'어디신데요?'
'저 서울이요.'
'저도요. 전 방촌인데.'
'방촌이면 제가 가죠. 방촌역 앞 카페 그리다 옆 골목에서 만나시죠. 이따가 열 시 반쯤에요.'
마른하늘에 별안간 폭우가 쏟아지고 잇따라 천둥번개가 내리친다. 우산 속으로 한껏 몸을 웅크린 영호가 약속 장소 앞에서 두리번거리며 서 있다. 영호는 계속해서 불안한 기색을 멈추지 못한다. 검은색 점퍼는 턱 아래까지 지퍼를 올려 잠그고, 새까만 마스크에 얼굴은 반 이상 가려져 있다. 덥수룩한 머리의 앞머리를 연신 앞으로 쓸어내리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저기요.”
갑작스러운 부름에 영호가 사시나무 떨듯 놀라며 빗물에 미끄러진다. 낯선 남자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난 영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본다.
“청룡검... 사러 오신 분이세요?”
“네, 여기요.”
낯선 남자가 물에 축축이 젖은 봉투 하나를 내민다. 확인해보라는 눈짓에 영호가 고개를 숙여 돈 봉투를 들여다본다. 빗발치는 비바람에 밤도 밤인지라, 봉투 안 금액을 식별하기 어렵다. 영호는 우산 손잡이를 겨드랑이 한쪽에 끼고는 봉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깡!
영호의 귀를 찢는 쇳소리와 함께 머리 한쪽이 터질 듯 울린다.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더니 곧 검게 일그러지고, 영호의 손에 들려 있던 봉투와 우산이 떨어져 폭우에 함께 천천히 쓸려나간다. 영호는 곧 중심을 잃은 채 고꾸라진다. 젖은 아스팔트에 영호의 얼굴이 부딪히는 순간, 흐릿한 시야 너머로 낯선 남자의 손에 들린 쇠파이프가 보이고, 이내 눈을 감는다. 낯선 남자는 영호의 주머니를 뒤져 신분증을 찾아낸다. 신분증 사진을 찍고는, 아직 멀었는지 주머니를 연신 뒤진다. 그리고 영호의 핸드폰을 찾고서야 자리를 벗어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둠은 한층 깊어져 있었고, 영호의 귀를 때리던 빗소리는 한결 잦아들어 있었다. 거세게 쏟아지던 폭우는 어느새 가랑비로 변해 있었다. 영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떠진다. 서서히 시야를 되찾자, 머리 한쪽의 욱씬거리는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영호는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다 손바닥으로 젖은 바닥을 짚고 일어선다.
“아, 진짜, 미친 새끼.”
영호가 한 번 더 뒷덜미를 어루만져 보지만 피는 나지 않는다. 무릎과 손바닥을 훌훌 털어버리고는 골목을 터덜터덜 빠져나간다.
다시 ‘콰광’하며 천둥번개가 한 번 밤하늘을 찢는다.
“아이씨, 놀래라. 아까부터 뭐야, 진짜?”
골목을 거의 벗어날 즈음, 끝자락에 자리 잡은 작고 허름한 건물 하나가 영호의 눈에 들어온다. 마치 골목 속 다른 세상인 듯, 노란 불빛이 어두운 골목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다.
“아까도 저게 있었나?”
다가갈수록 짙어지는 향 냄새에 코끝을 찡그린다. 입구엔 비에 젖은 박스와 부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반쯤 열린 문 안으로는 다소 험하게 생긴 석상들이 줄지어 있고, 새어 들어가는 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촛불들이 보인다. 깜빡거리는 노란 조명 위로 간판 하나가 보인다.
‘도도 신당’
아무래도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 발소리가 들릴세라 천천히 몸을 돌리자, 안에서 호통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설명하기엔 어려운 위험한 느낌,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영호의 등줄기를 스친다.
“들어와! 길을 따라 왔으면 들어와야지, 어딜 거스르려고 그래.”
“네...?”
“한 대 맞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얼른 안 들어와?”
도도신당 안 여자는 영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뭐하는곳인가요?